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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교동 일기

기획, 그 무수한 어긋남의 반복에 대하여

오늘 필자에게 보내는 제안서를 쓰면서, 기획이란 무수한 어긋남의 반복으로부터 탄생하는 작은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들고 싶은 책에 대한 상(像)이 있으면 그걸 실현시켜줄 저자가 없고, 반대로 용기와 의욕은 샘솟는데 정작 뭘 해야 할지 구체적인 상이 없는 상황이 요즘 들어 번갈아 반복되다 보니,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끊임없이 엇갈리기만 하는 남여 주인공들을 보듯 쓸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열렬한 구애에도 답장 없는 메일함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절로 그런 기분이 들 것이다.

하지만 <첨밀밀>에서 장만옥과 여명이 등려군의 노래에 이끌려 기적적으로 만났듯, 무언가를 조건 없이 좋아하고 몰입하는 능력을 잃지 않는 한, 결국 만나야 할 사람들은 만나고 만들어져야 할 책은 만들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장만옥과 여명을 만나게 해주자'가 기획의 아이디어라면, '등려군의 노래'처럼 그 두 사람을 이어줄 공통분모를 찾아 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기획을 실현시킬 핵심 콘셉트일지 모르겠다. 결국 아이디어 이전에 무언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능력. 그리고 그 타오른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소중히 키워가는 능력. 그것이 전부가 아닐까?

좋아하는 걸 눈치보지 않고 좋아하는 것. 살면서 받은 무수한 상처들로 경질화된 껍질 아래 잠들어 있던 그 말랑말랑한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니 기쁜 마음으로 더 많은 어긋남을 만들어 보자. 결국 하나의 노랫소리에 이끌리는 작은 기적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첨밀밀 (1997)

Comrades: Almost a Love Story 
9.3
감독
진가신
출연
여명, 장만옥, 증지위, 양공여, 크리스토퍼 도일
정보
로맨스/멜로 | 홍콩 | 111 분 | 1997-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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