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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교동 일기

응답하라! 마지널리안

 

응답하라! 마지널리안

 

 

정상우 라이팅하우스 대표 

  

 

독서를 통해 떠오른 생각을 책의 여백에 적어두는 사람들을 우리는 ‘마지널리안(marginalian)’1)이라고 부른다. 루터는 성서를 여백이 많은 종이에 베껴 쓰고 메모를 해가며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었다고 한다2). 루터의 『9월성서』가 등장하면서부터 비로소 본격적인 대중 출판의 시대가 열렸다3)고 하니, 어쩌면 루터는 마지널리안의 조상쯤이 될 듯하다.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한 『9월성서』가 보급되기 전, 생활의 모든 원칙은 원전에 접근할 수 있고, 라틴어를 해석할 수 있는 극소수 성직자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하지만 독일어 성서의 대량 보급으로 ‘정보의 비대칭’이 해소됨으로써, 종교개혁의 도화선에는 이미 불이 붙기 시작했다.

 

이렇듯 중세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 기여했던 출판업은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변혁을 예고하는 한 가지 뚜렷한 징후는 바로 마지널리안들의 실종이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책의 여백에 무언가를 메모하던 사람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지하철 안에서 흔하게 볼 수 있던 이들이 어느 순간부터 귀하디귀해져 버렸다. 스마트폰이나 아이패드 같은,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정보에 접속할 수 있는 마법의 스크린을 얻게 된 사람들은 더 이상 책을 펼치지 않는다. 하물며 책 한 귀퉁이에 무언가를 적는 일 따위는 말해 무엇하랴. 그렇다면 출판은 실종된 마지널리안들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는 걸까?

 


여전히 책은 정보의 비대칭을 해소하는 역할을 하지만, 인터넷에게 많은 부분 그 역할을 양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원본을 베껴 필사를 해두어야만 했던 시대로부터, 대량 출판이 가능해진 시대를 거쳐, 이제는 인쇄조차 필요 없는 네트워크와 전자책의 시대가 온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원전에 접근하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했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원전 자체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 같은 패러다임의 변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출판사의 위상 변화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과거에는 책을 출간한다는 것이 대개 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인정받고, 일종의 발언권을 얻게 됨을 의미했다. 따라서 책 출간을 위해 몇 가지 제도적 절차나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 필수였다. 저명한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거나 신춘문예나 문학상 같은 등단 과정을 거침으로써 필자는 책을 출간해 저자가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 조건을 얻었다. 그 후에야 비로소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출판사를 통해 직접 데뷔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의 출판사는 진입장벽을 지키는 일종의 게이트키퍼(gate keeper) 역할을 했고, 그만큼 위상도 높았다. 몇몇 출판사의 위상은 지금도 여전히 높지만, 대개는 과거와 같이 영향력이 크지도 않을뿐더러 필자 입장에서도 굳이 어려운 관문을 통과할 필요가 없어졌다. 장벽은 이미 허물어졌고 돌아서 들어갈 길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간의 길이 이처럼 수없이 열려있는데도 굳이 기존의 유명 출판사를 통해 책을 내려는 이유는 마지막 관문이 하나 더 남아있기 때문이다. 바로 자본의 관문이다. 출판업에 작동하는 엄연한 시장 논리 때문에 출판사의 유형무형의 자본력은 똑같은 저자의 컨텐츠일지라도 판매에서 하늘과 땅 차이의 결과를 만들어낸다.

 

한때, 출판계에서는 이 마지막 관문을 둘러싼 유명한 논쟁이 있었다. 한쪽의 주장은 매출 천억 대의 대형 출판사가 탄생하는 것이 외국 자본과의 싸움에서 한국 출판계 전체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바람직하다는 논리였고, 다른 한쪽에서는 매출 십억 대의 출판사 백 개가 존재하는 것이 출판 다양성을 위해 더 바람직하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자본의 논리에 따라, 거대 출판사를 지향하던 진영의 몇몇 출판사들이 우수한 편집자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며 빠른 속도로 외형을 확대해 갔다. 결과는? 결국 일천억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것은 출판업 자체가 내장하고 있는 특유의 불확실성 때문이었다. 인력이 늘고 외형이 커질수록 시스템에 의한 관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출판업은 이런 자질들과는 상극이다. 관리하기 위해서는 예측 가능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예외적이고 돌발적인 아이디어들은 시스템에서 초기에 걸러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정작 출판업에서 가장 큰 기회는 항상 상식과 표준을 벗어난 혁명적인 것으로부터 왔다. 여기에 바로 함정이 있었다. 외형이 커진 대형 출판사들은 판매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유명 저자들의 책에 매달려 선불금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그것은 제살 깎아먹기가 되어, 해외 원서들의 전체 선인세 평균을 올려놓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는 다른 국가들에 비해 더 비싼 선인세를 치르는 불명예스러운 컨텐츠 수입국이 되었다. 출판 대형화와 맹목적인 시스템 경영에 따른 폐해였다.

 

이제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앞서 변화된 패러다임에서 출판업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원전을 만들 수 있는 능력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상식을 벗어난 아이디어와 혁명적인 생각들은 바로 마지널리안들의 전유물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가 아는 위대한 작가와 사상가들은 대부분 동시에 위대한 마지널리안들이기도 했다. 결국 출판의 위기는 출판 외부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왔다. 우리 주위의 마지널리안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우리가 원전 만들기를 게을리하고 손쉽게 수입하기를 선택했을 때부터 위기는 시작된 것이다. 해외의 원전에만 매달리는 낡은 패러다임에만 열중할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원전을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들을 지원하고 발굴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기로에 선 출판은 이제 마지막 남은 최후의 관문마저도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바로 자본의 벽이다. 이제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출판이 가능한 시대가 오고 있다. 심지어 출판사를 거치지 않고도 책을 출판할 수 있는 플랫폼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새로운 기술은 종이책을 위협하고 있지만, 반대로 새로운 출판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주고 있다. 이제 기회를 얻기 위해 언제나 자본 앞에 무릎 꿇어야 했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있다. 반대로 자본이 아이디어 앞에 무릎 꿇을 날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실종되었던 마지널리안들과 함께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 책을 펼치고, 망설임 없이 낙서를 하자! 마지널리안이 되자! 



 

주)----------------------------------------------------------------------------------------------

1) '여백에 긁적거리기(marginalia)' 독서법을 실천하는 사람. 김병익, <문화일보> 인터뷰 중에서  

2) 사사키 아타루, 송태욱 역(2012),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서울 : 자음과모음, 84p

3) 이 책은 1519년 독일 전체 출판물의 3분의 1에 달했고, 1534년까지 85쇄를 찍어 10만 부가 팔렸다고 한다. _ 전게서. 9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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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저자
사사키 아타루 지음
출판사
자음과모음 | 2012-05-18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현재 일본 사상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비평가이자 젊은 지식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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